요즘 우리는 무언가를 '보지 않으면' 불안해집니다. 유튜브 알고리즘의 추천 영상, 인스타그램 릴스, 네이버 뉴스 실시간 검색어, 틱톡의 짧은 영상까지. 우리의 일상은 콘텐츠라는 무형의 흐름에 잠식되어 있습니다. 나는 그 흐름에서 하루만이라도 벗어나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결심한 것이 바로 '제로 콘텐츠 데이'. 스마트폰도 TV도, 심지어 책도 열지 않기로 한 날. 오직 나 자신과 현실의 시간만으로 채워진 하루가 어떤 감정을 남길지 궁금했습니다. 이제 제로 콘텐츠 데이 실험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번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아침이 느리게 오는 날: 무의식적인 습관과의 싸움
제로 콘텐츠 데이의 아침은 낯설었습니다. 눈을 뜨자마자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고, 손끝이 자동으로 인스타그램 아이콘을 눌렀습니다.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내 손이 먼저 알고 있는 이 습관의 무서움을. 나는 황급히 휴대폰을 뒤집어 침대 옆 서랍에 넣었습니다. 그제야 진짜 실험이 시작된 느낌이었습니다. 세수를 하고, 차를 끓이고, 조용히 창문을 열어 바람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평소보다 시간이 참 느리게 흐르더군요. 늘 무언가를 틀어놓고 뭔가를 보며 하던 일상이, 그렇게 콘텐츠 하나 없이 존재하니 어색하면서도 단단한 현실감이 느껴졌습니다.
뇌가 멍하니 쉬는 느낌도 들었고요. 평소에는 지나쳤을 바깥의 소리 옆집 아이가 노는 소리,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가 너무 생생하게 들렸습니다. 아침 8시에서 12시까지의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이는 ‘지루함’이 아니라 ‘비어 있음’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공백을 나만의 방식으로 메우고 싶어 작은 수첩을 꺼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아무것도 안 보니까, 내 생각이 보인다." 이 문장을 적고 나니, 이 하루가 나를 위한 진짜 실험이란 확신이 생겼습니다.
2. 오후의 침묵: 정보 없이 맞는 시간의 공포와 해방
점심을 먹고 나서부터는 본격적으로 '무언가를 보고 싶다'는 욕구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밖에 나가도 사람들은 전부 스마트폰을 들고 있었고, 카페에서 잠시 머무는 사이에도 내가 손에 쥐고 있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책도 가져오지 않았고, 음악도 없었습니다. 대신, 나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렇게 무심코 바라보던 도심의 풍경 속에서 수많은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걷고, 차량이 지나고, 아이가 웃고, 누군가 전화로 울먹이는 모습까지. 마치 시청각 콘텐츠를 차단한 대신, 내 눈앞의 현실이 HD로 업그레이드된 기분이었어요. '몰입'이란 단어가 이런 의미였을까? 하지만 동시에 나는 불안함도 느꼈습니다.
실시간으로 돌아가는 뉴스, 지금 누군가 나에게 보냈을지도 모르는 메시지, 놓치고 있는 정보들. 그런 조급함이 틈틈이 찾아왔습니다. 콘텐츠가 없는 삶은 ‘나만 낙오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유발하기도 했죠. 그러나 그 불안은 금세 사라졌습니다. 시간은 흘렀고, 나는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존재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이 느낌은 휴대폰을 보고 있을 때의 감각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주변인이 된 듯한, 무대 뒤의 관찰자가 된 듯한 조용한 충만함. 이 오후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가장 많은 것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3. 밤의 재발견: 고요 속에서 나 자신을 마주하다
저녁이 되자 외로움이 슬그머니 찾아왔습니다. 보통 이 시간쯤이면 유튜브를 보며 하루를 정리하고, 재미있는 영상을 몇 개 보다가 스르르 잠드는 루틴이 시작되는데, 오늘은 아무것도 틀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촛불을 하나 켜고, 노트북도 아닌 종이 노트에 내 감정을 적어보기로 했습니다.
생각보다 글은 쉽게 써졌고, 단어들은 오래 묵혀둔 감정처럼 차분히 흘러나왔습니다. 일기라는 행위가 어쩌면 제로 콘텐츠 데이의 유일한 ‘생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의 감정, 생각, 불안, 그리고 그 속에서 느낀 고요함까지. 밤이 되자 나는 더 이상 '지루함'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충전되는 느낌이 강했어요. 내 생각이 내 안에서 울림을 가지기 시작했고, 콘텐츠 없이도 스스로를 위로하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가 콘텐츠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 아닐까요?
마무리: 보지 않음으로써 보게 된 것들 제로 콘텐츠 데이는 단순한 디지털 디톡스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다시 확인하는 하루였습니다. 아무것도 보지 않음으로써, 내가 진짜 바라보고 싶었던 것들을 마주하게 되었고, 그중 대부분은 ‘내 안’에 있었습니다. 이 실험을 매일 하긴 어렵겠지만, 일주일에 하루, 혹은 한 달에 하루 정도는 꼭 다시 해보고 싶습니다. 정보의 물결 속에서 잠시 올라와 숨을 쉬는 날. 우리의 뇌도, 마음도 그런 날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그 날은 언제나 우리 스스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